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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 용신과 초년 기신의 체감 그래프

사주위키 송성엽 2025. 6. 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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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길흉화복 그래프는 객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인생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입니다.

  남들의 평가도 중요하겠지만 나 스스로 행복한지가 더 중요하니까요.
 
 제가 명리학은 선악을 다루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요?
 
 사주팔자에는 욕구불만 등도 나오지 않습니다.
 
 만족의 기준이라는 건 그 사람의 경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죠.
 

욕심이 많은 사람

 
 지난 글에서 그린 평운(μ=0)상태의 화복 그래프에서 색깔만 조금 다르게 칠해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μ+1σ 이상일 때만 복이라고 느끼고
 μ+1σ 이하일 때는 화라고 느낍니다.
 

욕심이 적은 사람

 
 그런데 이 사람은 욕심이 적어서
 
 μ-1σ 이상일 때도 복이라고 느끼고
 μ-1σ 이하일 때나 화라고 느낍니다.
 
 즉 위 두 사람에게 똑같이 0점짜리 일이 일어나더라도
 객관적으로는 같은 값이지만
 주관적으로는 화로 느껴지기도, 복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로
 컵에 물이 반이나 있네?
 컵에 물이 반밖에 없네?
 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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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 <민식이의 행복론>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누군가 “언제 가장 행복하냐”고 물으면 민식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화장실 갈 때요. 밥 먹을 때요. 걷고 있을 때요.”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웃으며 반문한다.
“너무 유치하고 동물적이잖아?”
하지만 민식이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가 ‘절대 잊지 못할 하루’는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이틀 전인 11월 4일이었다.
그날, 친구들과 교실에서 자습을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수위 아저씨가 달려오며 외쳤다.
“너희 반 애 둘, 학교 앞에서 트럭에 치여 병원에 실려 갔어!”
놀란 친구들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는 명수와 병호가 피범벅이 된 채 누워 있었다.
특히 병호의 상태는 심각했다. 머리를 크게 다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곧장 수술실로 옮겨졌고, 병호 어머니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민식이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 제발 병호를 살려 주세요. 수능을 망쳐서 대학에 떨어져도 좋습니다. 제 친구를 살려 주세요.”
당시 민식이가 친구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희생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 순간,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던 명수가 갑자기 외쳤다.
“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오줌 마려워!”
민식이는 한 사람의 삶과 또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동시에 보았다.
한 친구는 세상을 떠났고, 다른 친구는 살아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때 민식이는 생각했다.
‘명수야, 축하한다. 네가 지금 깨어나서 오줌 마렵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진짜 축복이야. 진짜 행복이야.’
그날 이후로 민식이는 행복이란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숨을 쉴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고
화장실에 갈 수 있고
걸어서 학교에 갈 수 있고
눈으로 하늘을 볼 수 있고
작지만 예쁜 교정을 바라볼 수 있고
그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민식이는 말한다.
가끔 맛있는 걸 먹거나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거나
친구들과 운동하고
조카들과 노는 건
모두 보너스라고.
자신의 삶은 그런 보너스 행복들로 가득하다고.
민식이 말대로라면,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읽으며 숨 쉬고 있는 우리도 이미 완전한 행복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 외의 것들은 다 보너스다.
좋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보너스,
학생들이 쓴 글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책상 위에 쌓인 일거리조차도 축복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삶도 민식이처럼 보너스 행복으로 가득하다.
문득 떠오른 시가 있다.
전신마비를 앓는 시인이자 구족화가인 이상열 씨의 <새해소망>이라는 짧은 시다.
“새해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게 하소서.”
 
 
 
감동적인 글이죠?
근데 제 T스러운 스타일 잘 아시죠?
감동 파괴 들어갑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욕심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버리기 쉬웠으면 벌써 다 버렸죠.
무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욕심은 갖고 싶다고 더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럼 세상에 게으른 사람이란 게 없겠죠.
야망을 품고 행동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사주를 독학하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초년 용신이 좋다, 중년 용신이 좋다
하면서 싸우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큰 의미는 없는 논쟁이죠.
초년이나 말년이라는 말 자체도 명리학적이거나 정의가 명확하지도 않지만요.
아무튼 비교해 봅시다.
 

행복도 점수

 
 태어났을 때는 만족의 기준을 0에다 두겠습니다.
 

초년 용신

 
 초년 용신 즉 길운을 겪으면 복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만족의 기준이 굉장히 높아지죠.
 물론 처음 만족의 기준인 0보다 높아지기 때문에 행복해집니다.
 

말년 기신

 
 말년 기신 즉 흉운을 겪으면 화를 많이 입습니다.
 그런데 만족의 기준이 이미 매우 높아져 있기 때문에 매우 불행해집니다.
 

초년 기신

 
 초년 기신 즉 흉운을 겪으면 화를 많이 입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만족의 기준이 낮아지지 않습니다.
 잠시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어쨌든 만족의 기준인 0보다 낮아지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말년 용신

 
 말년 용신 즉 길운을 겪으면 복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만족의 기준이 이미 매우 낮아져 있기 때문에 매우 행복해집니다.
 
 그럼 초년 용신과 초년 기신 중에 뭐가 더 좋냐?
 그런 이야기를 할 건 아닙니다.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길운과 흉운, 흉운과 길운 순으로 두 개씩만 겪지 않게 되었습니다.
 길흉길흉이나 흉길흉길처럼 여러 번 반복되죠.
 
 순서가 어떻게 되든 길운을 겪은 뒤에는 만족의 기준이 높아집니다.
 이 보라색 선, 만족의 기준은 웬만하면 높아지기만 하고 낮아지지는 않습니다.
 
 화야 뭐 당연히 불행이지만
 복도 뭐 당장은 행복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만족의 기준을 높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더 큰 불행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죠.
 
 그래서 길흉화복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고 싶다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요.
 
 그럼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뭘까요?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은 나중에 말씀드리고요?
 회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은 있습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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